자연철학2023. 4. 15. 10:33

 사람은 늘 예측을 하면서 살아간다. 길을 걷거나 뛰어갈 때, 계단을 오르내릴 때, 인지 못하는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 예측하고 행동하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넘어져서 다치는 일을 피할 수 있다. 먹을 것을 찾고,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서, 경쟁하고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예측해야 했다. 그래서 진화에서 주변을 지각하여 대응하는 이 지능이라는 기능의 가장 큰 기여는이러한 예측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예측은 인간 생애에 한정되어 일어난다. 우리는 100년 남짓의 지구에서의 생활에 최적화되어 예측을 행한다. 그러나 근대를 지나서 집단 지성을 통해 드디어 인간은 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 범위를 뛰어넘기 시작했고, 뉴튼은 이러한 기념비적인 정확한 예측 작업의 체계적인 첫 시작을 한 것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천체의 움직임을 중력이라는 원리로 인해 수학적으로 기술함으로써 이제 행성의 위치를 매우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수학은 이렇게 인간의 지각을 넘어서는 분야에서 예측의 중요한 도구가 되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오감으로 느껴지는 일부분 외에는 소위 "직관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예측하기 어렵다. 너무 작은 세계이거나 너무 느리거나 빠른 세계의 현상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분야에 대해서는 뇌가 곧바로 대응하지 못한다. 뇌에 축적된 경험이나 반응은 인간에게 익숙한 현상들에 집중되어 있다. 인간은 양자의 세계를 온전히 편안하게 이해할 수 없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평범하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엄연히 잘 느끼는 온도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체계를 잘 몰랐던 일식이나 월식도 마찬가지였다. 전체적으로 어떤 모습의 인과속에서 작동하는지는 눈에 전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었다.

 

 우주의 기원같은 문제도 마찬가지다. 지구의 역사도 그렇다. 애초에 그런 것들은 인간이 평소 보유한 경험이나 그 상상에도 대부분 어긋난다. 그런 것들이 교육을 통해 편안한 마음으로 머리 속에 자리잡도록 기대하는 것 자체가 이 문제의 난이도를 과소 평가하는 셈이다. 어떤 인간도 편안하게 이런 세계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인류가 그것을 수학적으로 기술하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아주 어렸을 적에 그것들을 배운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우리의 뇌는 그런 것들을 받아들이도록 진화되거나 훈련되어 있지 못하다. 그저 수학이라는 도구 혹은 기계를 통해서 바라보고 예측해낼 수 있을 뿐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오늘 다뤄보고 싶은 것은 우주의 역사에 대한 부분이다. 반복해보자면, 우주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의 시작은, 우선 그것이 지구에 살아가는 동물로서의 일반적인 이해력으로 따라가기 어렵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주의 역사 같은 것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축적한 경험과 지식과는 그 양상이 다르다. 대략은 어찌어찌 그렇게 받아들인다고 쳐도 그 현상을 자세히 예측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그저 남이 예측한 것을 그때그때 외울 수 있을 뿐이다. 수학적인 접근이 없다면 그래서 각 상황별로 정확히 계산해서 예측하기도 어렵다. 공을 던지는 것을 몇번 바라보고 그 공을 잡을 수 있게 되는 것은, 중력을 온몸으로 이해하고 있는 이 지구라는 공간 정도 뿐이다. 양자의 세계에서나 우주의 시간에서 몇번 바라보고 공을 잡아내는 계산을 할 수 있는 논리회로가 뇌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먼저 이 사실을 마음깊이 이해해야만 우리는 우리가 보지 않았던 것들을 예측하는 첫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그리하여 자연을 연구한 이들은 자신의 본성보다는 여러가지 상상력 속에서 수학에 더 깊이 몰입해 이 도구를 신봉하게 된다. 이 계산의 틀만이 대칭과 보존을 이루는 것으로 믿어지는 자연을, 놀라운 스케일과 다양한 조건 속에서 예측해낼 수 있다. 적절한 가정을 통해 계산하여 관측 결과와 들어맞으면 우리는 이 방정식을 통해, 우리가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자연을 구체화하고 드디어 예측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수한 노력에 따라 인간이 우주에 대해서 하고 있는 현재의 예측은 다음과 같다. 엄청난 시간 속에 우리의 미래는, 영원한 팽창과 멀어짐 속의 소멸로 간다. 그러나 이 사건을 운석 충돌로 인한 공룡의 멸망과 같이 놓고 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너무 느린 속도로 진행 되고 있기 때문에 티끌만큼도 걱정할 대상이 아니다. 인간의 본능적인 소멸에 대한 이해와 수학적으로 예측한 우주의 소멸에 대한 이해가 달라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인간이 경험한 어떠한 재앙스러운 소멸도 이 계산의 결과를 이해하는 일에 쓰이기에는 부적당하다. 그것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uD4izuDMUQA 

 

 이렇게 내가 경험하기 어려운 공간과 시간을 예측하기를 원하는 이는, 그것이 인간의 본성과는 괴리됨을 이해하고 그리고 그것이 수학이라는 도구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먼저 인지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수학 체계에 대한 여러가지 이해의 시도가 그나마 인간을 이러한 경험하지 못한 세계로의 이해로 안내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 가장 집중해야할, 그나마 인간이 인지하기 어려운 자연을 이해할 수학 체계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무엇을까? 바로 대칭과 보존, 무한과 임의성 같은 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몇가지 과거의 경험과 상상이면 이러한 대칭이나 보존 같은 정도는 내 본능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늘 시각에서 대칭을 잘 찾아내고 아름다워 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것들에 대한 기술은 이미 몇 편의 이 블로그 글에서 진행했는데, 과연 이것으로 어떻게 우주를 상상하고 예측해 볼 수 있다는 말일까?

(신비롭게도 아직 우주에는 대칭이나 보존이 깨졌다는 명백한 증거를 발견한 적이 없고 반대로 그것이 지켜진다는 증거는 도처에 존재한다.)

 

 첫번째는 우주에는 무한의 시간 속에 모든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그 각각의 모든 일이 무한번 발생하게 된다. 우연히 물감을 엎질렀는데 모나리자가 그려질 확률은 0에 가깝지만, 무한의 세상에서는 무한번의 모나리자가 그려진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러한 통찰은 생명의 탄생이나 여러가지를 설명해 줄 수 있다. 우리는 그 무한의 어딘가 한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인류가 거의 무한번 나타난다고 해도 이상한 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확률이 희박한 것은 무한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한에서는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모두 무한번 일어난다. 이런 점에서 우주가 탄생하고 영원히 나이먹는 과정 정도만 밝혀진 상황에서도, 우주의 탄생이 단 한번의 유일한 것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두번째 사실에 근거한다.

 

 두번째는 우리가 담고 있는 세계가 보여주는 대칭과 보존이다. 미시세계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대칭과 보존은 깨어지지 않는다. 사람이 시각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이 대칭은 무언가 기억하지 않고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단순한 수학적 전개가 이루는 기본 틀이다. 우주가 어떻게 태어나고 팽창하던 그것은 무한의 반복 속에서 대칭과 보존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런 사실만으로도 다중 우주에 대한 주장이 곧바로 지지받게 된다. 만약에 우리가 사는 우주가 어떤 닫힌 무엇인가라면 합쳐서 0이 되는 반대의 무엇인가가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한번 생긴 것이라면, 단독으로 생길리 만무하다. 그것은 보존 속에 무한번 다양하게 생겨야 한다. 대칭으로 태어나 무한번 반복되어야 한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런 면에서는 양자역학으로 증명된, 세계가 이산적(discrete)이라는 해석은 당혹스럽기는 하다. 왜 그런 끊김이 존재하는가. 그런 끊김이 대칭과 보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그리고 왜 하필이면 그 scale에서(플랑크 상수) 끊기는가. 그것은 계속 상위와 하위에서 반복되는가?

 

 이런 기본적인 상상들이 이 분야에 대해, 그나마 인간의 이성으로 도전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계산하기 전에 수학이 가진 여러가지 틀 관점에서 바라보는 그런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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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동미학